모리 다다마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모리 다다마사는 센고쿠 시대 무장이자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이다. 모리 요시나리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 모리 나가요시의 사망으로 가문을 계승했다. 도요토미 정권 하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참여, 시나노 가와나카지마 번주를 거쳐 미마사카 쓰야마번의 초대 번주가 되었다.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하고, 쓰야마성 축성, 경제 진흥, 공공 사업을 통해 번의 기반을 다졌다. 최종 관직은 종4위상 좌근위권중장이었다. 1634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쓰야마번주 - 마쓰다이라 노부토미 (1680년)
마쓰다이라 노부토미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의 양자가 되어 쓰야마 번을 세웠으며, 농민 봉기 후 촌장 제도 및 재정 개혁을 통해 번정을 안정시키고 쇼군의 이름 한 자를 받아 개명하였다. - 쓰야마번주 - 모리 나가쓰구
에도 시대 쓰야마 번의 번주 모리 나가쓰구는 선대 번주의 양자로서 번제 확립에 기여하고 동생에게 영지를 분할해 미야가와 번을 세웠으나, 후계 문제 소송으로 쓰야마 번을 몰수당한 후 빗추 니시에바라 번을 받아 가문을 이어나갔다. - 마쓰시로번주 - 사나다 노부유키
사나다 노부유키는 센고쿠 시대 말기부터 에도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한 무장으로, 아버지와 함께 우에다 성을 지키고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이 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 후 가족을 구하고 영지를 계승하여 마쓰시로 번주로 번영을 이끌었다. - 마쓰시로번주 - 사카이 다다카쓰 (1594년)
사카이 다다카쓰는 에도 시대 초기의 다이묘로,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다다' 자를 받아 이름 지어졌으며, 구나이타이호 서임 후 다카다 번, 마쓰시로 번을 거쳐 쇼나이 번의 초대 번주를 지냈고, 쇼나이번 통치 시기 가혹한 징세와 후계 문제로 백성들의 불만을 샀다. - 모리씨 (와카쓰키씨) - 모리 나가나오
모리 나가나오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쓰야마 번주 모리 나가쓰구의 아들이며, 쓰야마 번의 가독 계승 문제로 사이가와라 번 초대 번주가 된 후 아카호 번으로 이봉되어 재정 악화 극복을 위해 노력했고, 사위이자 양자인 모리 나가타카가 그의 뒤를 이었다. - 모리씨 (와카쓰키씨) - 쓰야마번
쓰야마 번은 1603년 모리 다다마사가 개창한 번으로, 쓰야마 성을 축성하고 조카마치 정비를 통해 기초를 다졌으며, 이후 마쓰다이라 가문이 통치하다가 1871년 폐번치현으로 쓰야마 현이 되었다.
모리 다다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모리씨(森氏) |
이름 | 모리 다다마사 |
원어 이름 | 森 忠政 |
가몬 설명 | 두루미 고리(鶴の丸) |
![]() |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겐키 원년(1570년) |
사망 | 간에이 11년 음력 7월 7일(1634년 7월 31일) |
개명 | 나가시게(長重) → 가즈시게(一重) → 다다시게(忠重) → 다다마사(忠政) |
별명 | 하시바 우콘(羽柴右近) |
시호 | 본원원전전작주국주우림중랑장선옹종진대거사(本源院殿前作衆国主羽林中郎将先翁宗進大居士) |
묘소 | 교토부다이토쿠지 삼현원 오카야마현쓰야마시의 본원사 |
관위 | 종5위하・우콘노조、종4위하・시종、종4위상・좌근위권중장 |
정치 경력 |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쿠가와 이에야스 → 히데타다 → 이에미쓰 |
번 | 시나노가와나카지마번주 → 미마사카쓰야마번주 |
전임 후임 | 예 |
전임 후임 대수 | 1 |
전임 후임 직책 | 미마사카 쓰야마번주 |
전임 후임 임기 | 1603년 ~ 1634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모리 요시나리 |
어머니 | 묘향니 |
형제 | 요시타카, 나가요시, 나리토시, 나가타카, 나가우지, 모리 다다마사, 벽송원, 마시다 나가모리실, 아오키 히데시게실, 우메 |
아내 | 정실: 지보(チボ, 나카가와 기요히데中川清秀의 딸) 재혼(계실): 지쇼인(智勝院) 측실: 오타케 |
자녀 | 시게마사, 호랑이, 다다히로, 오마쓰, 구로, 기쿠, 미야, 고, 법광원 양자: 나가쓰구 |
기타 정보 | |
특기 사항 | 모리 가나메의 조카 |
2. 가계
모리 씨의 본성은 겐지이며, 세이와 겐지의 일가인 가와치 겐지의 계통이다.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4대손인 모리 이즈노카미 요리사다를 시조로 칭하지만, 이 계보는 가탁(다른 가문의 계보를 빌려오는 것)이라는 설도 있다.
2. 1. 가족 관계
wikitext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모리 요시나리 | 1523년 ~ 1570년 |
어머니 | 묘코니 | 1524년 ~ 1596년, 에이, 하야시 미치야스의 딸 |
정실 | 치보 | 나카가와 키요히데의 딸 |
장녀 (정실 소생) | 오마츠 | 이케다 나가유키의 정실 |
계실 | 지쇼인 | 1575년 ~ 1607년, 이와, 나고야 산자부로의 여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양녀 |
삼녀 (계실 소생) | 키쿠 | 이케다 타다츠구의 부인, 이후 토리이 타다츠네의 정실 |
사녀 (계실 소생) | 미야 | 시조도노, 이케다 나가유키의 계실 |
차남 (계실 소생) | 토라마츠 | 1602년 ~ 1612년 |
삼남 (계실 소생) | 모리 타다히로 | 1604년 ~ 1633년 |
육녀 (계실 소생) | 호코인 | 혼다 타다요시의 정실 |
측실 | 오타케 | 야마우치 유토요의 딸 |
장남 (측실 소생) | 모리 시게마사 | 1593년 ~ 1618년 |
차녀 (생모 불명) | 쿠로 | 오조라쿠, 모리 마사노부의 부인 |
오녀 (생모 불명) | 사토 | 세키 나리츠구의 정실 |
양자 | 모리 나가츠구 | 1610년 ~ 1698년, 세키 나리츠구의 장남 |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형들의 연이은 죽음 속에서 어린 나이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밑에서 성장하며 미노국 가나야마 성주가 되었고,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여 세키가하라 전투를 전후해 시나노국 가와나카지마로 영지를 옮겼다. 시나노 번주 시절 엄격한 검치와 농민 봉기 진압을 겪었으며, 이후 미마사카 국 쓰야마번 18만 6,500석으로 영지가 늘어나 쓰야마성을 축성하고 번의 기틀을 다졌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측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후계자 문제와 영지 이전 논의가 있었으나, 교토에서 급사하였다. 그의 생애는 격동의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초기를 거치며 영지를 확장하고 가문의 기반을 다진 과정이었다.
3. 생애
3. 1. 유소년기
1570년(겐키 원년), 미노국 가나야마 성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모리 요시나리의 여섯째 아들(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미노의 호족 하야시 미치야스의 딸 에이(후의 묘코 젠니)이다. 어릴 적 이름은 센치요였다. 태어난 해에 아버지 요시나리가 전사하였고(장남 요시타카는 아버지보다 먼저 전사했다), 가독은 차남 나가요시가 이었다.
이시야마 전투의 화해가 이루어질 때, 어머니 묘코 젠니는 정토진종의 문도였기 때문에 오다 가문과 혼간지 간의 강화 사절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이때 화해 조약의 조건 중 하나로 "모리 가문과 관련된 인물을 승려로 만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센치요가 잠시 승적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키 나리마사(모리 요시나리의 사위)의 넷째 아들 타케와카마루가 대신 승려가 되어(법명 료코), 센치요는 곧 환속하였다.[1]
1582년(덴쇼 10년) 봄 무렵에는 나가시게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오다 노부나가에게 고쇼로서 출사했다. 하지만 동료 얀다 카와치노카미에게 시비를 걸어 노부나가 앞에서 얀다의 머리를 부채로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본 노부나가는 "센은 아직 시중들기 어려울 것 같으니 어머니에게 돌려보내라"고 명했고, 결국 센치요는 3월에 미노국에 있는 본가로 돌려보내졌다. 결과적으로 이 일 덕분에 그는 혼노지의 변에 휘말리지 않게 되었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났을 당시, 센치요는 어머니 묘코 젠니와 함께 오미국 아즈치 성에 있었다. 변란 소식을 접한 후, 모리 가문과 우호 관계에 있던 코가류 닌자 반 이안의 도움으로 정세가 불안정한 아즈치를 탈출하여 코가에 있는 이안의 영지에 숨었다. 같은 해 9월 11일, 영지 근처의 상황을 안정시킨 형 나가요시가 마중 사절을 보냈고, 센치요는 이세국에서 인계받아 어머니와 함께 가나야마로 돌아갔다.[1]
3. 2. 가독 상속
1584년(덴쇼 12년) 4월 9일, 형인 모리 나가요시가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전사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다른 형들은 모두 요절했고, 모리 가문의 후계자는 나가시게 뿐이었다. 나가요시가 전사한 후, 유언장이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제출되었지만, 나가요시는 유언장에서 나가시게의 가독 상속에 대해 "후계자는 싫다"고 적었고, 게다가 금산은 믿을 수 있는 무장에게 맡기고 나가시게는 히데요시 밑에서 봉사하도록 지정하는 등 나가시게의 가독 상속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도 자신에게 협력한 무장의 영지를 몰수할 수는 없었기에 유언의 이 구절은 무시하고, 나가시게를 금산 7만 석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가카미 모토마사와 하야시 타메타다 두 가로를 후견인으로 임명했다. 모리 가문도 금산에 그대로 남겨졌다. 나가시게는 가독을 잇자마자, 과거에 은혜가 있던 반 코레야스나 아들 반 코레토시 등 나가요시 시대까지 협력자였던 코가 슈에게 모리 가문에의 시관을 타진하여, 정식으로 고용했다.
1585년(덴쇼 13년)이 되자 "이치시게"로 개명했다. 같은 해 도야마 전투에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16세에 첫 출전을 했고, 10월 6일에 종5위하·우콘노조에 서임되었다. 1586년(덴쇼 14년)이 되자 "타다시게"로 개명하고 히데요시의 관백 배하를 위해 참내했다.
3. 3. 도요토미 정권 시기
1587년(천정 15년) 2월 6일, 히데요시로부터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종4위하 시종에 서임되었다. 동시에 하시바(羽柴) 성과 오동나무 문장의 사용도 허가받아, 이후 '''羽柴 右近大夫 忠政|하시바 우콘다이후 타다마사일본어'''라고 칭하게 되었다.[2] 같은 해 규슈 정벌에는 눈병을 이유로 직접 참전하지 않고, 대신 林 為忠|하야시 타메타다일본어를 대장으로, 伴 惟利|반 코레토시일본어 등을 부장으로 한 부대를 파견했다. 1590년(덴쇼 18년) 오다와라 정벌에는 직접 출진하여 니라야마성 공격에 참여했다.
분로쿠·게이초의 역(조선 출병) 때는 규슈의 나고야성 축성 공사를 담당했으며, 병사 2,000명을 이끌고 나고야성 아래에 주둔했지만 직접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후시미성 축성, 호코지 대불(교토 대불) 건립 등에도 참여했다.
1598년(게이초 3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했다. 1599년(게이초 4년) 후시미성 아래에서 이에야스와 마에다 도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등이 대립하여 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다다마사는 이에야스의 저택을 방문하여 3일간 머물렀고, 이에야스로부터 상을 받았다.[1]
1600년(게이초 5년), 이전부터 원했던 시나노국 가와나카지마 13만 7,500석으로 영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는 태합蔵入地 약 9만 석을 폐지하고 영지를 늘려 옮기는 것이었다. 같은 해 2월, 기존에 가와나카지마 4만 석을 다스리던 타마루 나오마사와 서로 영지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동이 이루어졌다. 이때 카와지리 히데나가, 츠마키 요리타다 등 일부 가신들은 시나노로 따라가지 않고 미노에 남았다. 이 영지 이동은 후대에 이에야스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이동 전에 마스다 나가모리, 마에다 겐이, 나쓰카 마사이에 등이 시나노에 들어가 타마루 나오마사에게 모리 가문으로의 御蔵米|미쿠라 마이일본어(직할령 쌀) 양도를 지시했던 점 등으로 미루어[3], 도요토미 가문의 공인 하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다다마사는 "히데요시 공께서 살아계실 때 형 나가요시의 뒤를 이어 신슈 가와나카지마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히데요리 공에게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부디 가와나카지마를 하사해 주십시오."라고 이에야스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3. 4. 시나노 가와나카지마 번주 시대
1600년(게이초 5년) 3월, 다다마사는 가와나카지마 13만 7천 석의 영지를 받아 입성하였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덴쇼 임오의 난 때 형 나가요시를 배신했던 고사카 마사모토의 일족을 찾아내 처형하는 등 초기부터 강경한 통치를 예고했다. 또한 거성인 가이즈 성의 이름을 '마치 성'(松城)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형 나가요시의 유지를 잇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4월, 이시다 미쓰나리가 오사카 방면 전투에 모리 가문의 참전을 요청하기 위해 가와나카지마를 방문하여 다다마사와 회담을 가졌다. 다다마사는 표면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의 가신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비판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다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성의 이름도 다시 모리 성으로 되돌렸다. 미쓰나리는 다다마사의 태도에 크게 분노하여 사나다 마사유키에게 보낸 서신에서 다다마사를 강하게 비난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7월 21일,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군에 합류하기 위해 우쓰노미야에 도착했다. 그러나 7월 24일, 사나다 마사유키가 서군에 가담하여 우에다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야스는 다다마사와 이시카와 야스나가에게 사나다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다다마사는 고야마 평정이나 나카센도 군대의 행군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영지로 돌아간 후에도 이에야스 및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서신을 교환하며 정보를 공유했다. 그는 이에야스의 명령에 따라 가와나카지마에 머물렀으며, 9월의 제2차 우에다 전투에도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다만 휘하의 이도 우에몬 등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를 우에다 북쪽 지조 고개 부근에 파견하는 수준의 군사 활동만 수행했다.[1]
히데타다가 이끄는 나카센도 군대가 우에다 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전에 상경 명령을 받아 떠나게 되자, 다다마사는 히데타다의 지시에 따라 센고쿠 히데히사 등과 함께 사나다 가문에 대비하기 위해 영지에 남겨졌다. 다다마사는 가쓰라오 성의 성대리 이도 우에몬에게 우에다 감시를 명했으나, 사나다 노부시게(사나다 유키무라)가 이끄는 사나다 군은 9월 18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가쓰라오 성에 야습과 새벽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같은 달 사나다 가문이 항복하고 성을 넘겨주었을 때, 도쿠가와 군의 입성에 반발하는 영민 봉기가 일어나자 다다마사는 이를 신속하게 진압했고, 이 공로로 히데타다로부터 상을 받았다.[4] 하지만 전투 후 영지 가증은 없었다. 그해 10월에는 오랫동안 모리 가문을 섬겨온 중신 가카미 모토마사가 사망했다.
1602년(게이초 7년) 8월, 다다마사는 시나노 4개 군 전체를 대상으로 '우콘 검지'(右近検地)라 불리는 대규모 토지 조사를 실시했다. 이 조사는 매우 엄격하게 진행되어 시나노 4개 군의 석고는 기존 13만 7천 석에서 19만 석으로 5만 석 이상 급증했다. 이는 영지 내 백성들에게 막대한 세금 부담 증가를 의미했다. 백성들은 토지 조사를 다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다다마사는 이를 무시했다. 결국 압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이는 시나노 4개 군 전역으로 확산되는 대규모 봉기(전령 봉기, 伝領一揆)로 발전했다. 다다마사는 이 봉기를 철저하게 무력으로 진압했으며, 체포된 봉기 가담자 수백 명을 토리우 고개에서 십자가형에 처하는 등 가혹하게 처벌하여 사망자가 600명 이상 발생했다.[5] 젠코지에 남아있는 '천인총'(千人塚)은 이때 다다마사에게 희생된 사람들을 위령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전해진다(후대에 다른 봉기 희생자를 기린 것이라는 설도 있다). 봉기 이후에도 다다마사는 토지 조사 재실시 요구를 일절 받아들이지 않았다.
1603년(게이초 8년),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고바야카와 가문이 개역되자, 다다마사는 미마사카 국 쓰야마번 18만 6,500석으로 영지가 가증되어 전봉되었다. 그의 후임으로 가와나카지마에는 마쓰다이라 타다테루가 들어왔다.
3. 5. 미마사카 국주 시대
모리 가문이 미마사카 국의 새로운 영주로 임명되자, 이 지역에 남아 있던 옛 고바야카와 가문의 가신들이나 우키타 히데이에의 가신이었던 낭인, 그리고 지역 토착 세력들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고바야카와 가문의 옛 가신이었던 난바 소무를 중심으로 약 2,680여 명이 하리마 국과 인바 국의 경계 지역에 자리를 잡고 모리 다다마사의 입국을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6]
이 소식을 들은 다다마사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해 1,000명도 채 되지 않는 인원을 이끌고 시나노 국을 출발했다. 그는 무력 충돌보다는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미마사카 지역의 유력 토착 세력인 아리모토 사다마사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아리모토 세력의 안내를 받아 미마사카로 들어가려 하자, 이를 눈치챈 반대 세력은 당황하여 다다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야습을 시도했다. 그러나 다다마사 일행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다른 야습 부대와 마주쳐 서로 싸우는 등 혼란을 겪었다. 이 틈을 타 다다마사 일행은 무사히 미마사카에 입성했다. 당시 낭인 신분이었지만 미마사카 지역 유력 가문의 종가였던 아리모토 사다마사는 반란에 가담했던 일족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이는 반란 세력의 와해로 이어졌다.
애초에 반란 세력의 목표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모리 가문의 진입을 막고, 협상을 통해 기존의 기득권을 인정받는 것이었다.[7] 하지만 다다마사가 이미 입국에 성공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서둘러 모리 가문에 항복하여 환심을 사고 자신들의 권익을 유지하려는 자들이 늘어나면서 반란 세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들이 점거하고 있던 린야 성도 모리 가문에 넘어갔고, 지도자 격이었던 난바 소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리 가문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이들은 미마사카를 떠났고, 결국 큰 전투 없이 반란은 종결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아리모토 씨를 비롯해 일찍 모리 가문에 협력한 칸노 씨, 후쿠시마 씨, 사토 씨 등은 기존의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거나 모리 가문의 가신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뒤늦게 항복한 자들에게는 약속했던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무사 신분을 박탈당하고 농민으로 돌아가도록 강요받는 등 엄격한 처분이 내려졌다. 여기에서도 급격한 세입의 증가가 나타났지만 후에 반대에 부딪혀 되돌렸다.
미마사카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다다마사였지만, 새로운 성을 지을 장소를 두고 이전부터 관계가 악화되었던 중신 이도 우에몬과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다다마사는 같은 해 5월 인노쇼의 공사 현장에서 나고야 산자부로에게 이도의 살해를 명했고, 우에몬의 두 동생도 자객을 보내 암살하여 이도 일족을 말살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필두 가로인 하야시 타메타다를 비롯한 하야시 일문이 모리 가문을 떠나는 사태에 빠졌다. 두 축 체제의 한 축이었던 카가미 모토마사도 이미 사망하여, 이로 인해 필두 가로 자리에는 젊은 카가미 모토미네 (모토마사의 적자)가 취임하게 되었다.
1604년에는 반 나오츠구를 총봉행으로 하여 영내의 검지를 실시했다. 또한, 전년의 사건으로 인해 중단되었던 성의 건축 예정지를 인노쇼에서 쓰루야마의 땅으로 변경했다. 지명을 쓰루야마에서 "쓰야마"로 고쳐 성의 건축을 재개했다. 이것이 쓰야마성이다. [8] 또한, 축성에 즈음하여 황폐해진 다이세이지의 재건에도 힘썼다. 덧붙여, 공사 봉행은 반 타다야스의 아들 유이리였다.
한동안은 가정도 안정되었지만, 1608년에 석재 채석장에서 필두 가로인 카가미 모토미네가 싸움 끝에 가로인 오자와 히코하치를 살해했다. 또한 중재에 나선 가로 호소노 사헤에 역시 모토미네의 가신에 의해 참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교롭게도 다다마사는 참근교대 때문에 에도에 있었지만, 이 사건은 오쓰카 단고노카미의 재량에 의해 가중 소동과 같은 큰 사태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다마사는 이 상황에 격노하여 3 가로의 영지를 몰수했다. 이 후, 한동안은 오쓰카 단고노카미가 중심이 되었지만 그 오쓰카도 1612년 7월에 사망했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다다마사는 새로운 가신을 억누를 인물을 찾아 에도 막부하타모토가 되어 있던 숙부 모리 요시마사의 쓰야마 번 진입을 막부에 희망했다. 막부도 이를 인정하여 다다마사는 요시마사에게 5,000석의 영지와 집정직 권한, 더 나아가 사촌 동생이자 요시마사의 넷째 아들 요시하루에게도 3,000석의 영지를 주었다. 요시마사 등의 쓰야마 진입 시에는 직접 국경 부근까지 마중을 나가는 등 후하게 대접했다. 이후, 가신 내 불상사라고 할 만한 일은 수습되었다.
3. 6. 오사카 전투
1614년(게이초 19년)에 벌어진 오사카 겨울 전투에 이케다 다다쓰구 등 서쪽 지역 다이묘들과 함께 참전했다. 나카노시마를 거쳐 이마바시 근처에 진을 쳤다. 그러나 11월 27일, 다다마사는 소년 몇 명을 데리고 오사카성에 접근하다가 발각되어 총격을 받았고, 군감(軍監, 군대 감독관) 조 마사시게의 제지로 진영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조 마사시게는 다다마사가 군법을 어겼다며 모리 군에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11월 29일 바쿠로부치의 전투 때까지 풀리지 않아, 모리 군은 덴마 강을 건너지 못하고 전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30일, 막부의 상사인 미즈노 가쓰나리가 전날 전투에서 모리 군의 소극적인 태도를 질책하러 왔으나, 다다마사는 "군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결국 미즈노는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정지 명령을 해제하지 않은 조 마사시게의 책임을 물었고, 조 마사시게는 군감에서 면직(후에 영지 몰수)되었다. 이후 미즈노 가쓰나리가 군감을 맡아 다다마사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615년(게이초 20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에도 참전하여, 모리 군은 적의 수급 208개를 얻는 전과를 올렸다. 특히 가신 모리 가하루는 오사카 측의 후세야 히다노카미를 물리치는 등 활약했다.
전투 후 다다마사는 군공을 인정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명검 아이젠 구니토시를 하사받았다(다다마사 사후 유품으로 도쿠가와 쇼군 가문에 헌상되었다).
3. 7. 만년
1616년(게이초 21년), 13년에 걸쳐 건설한 쓰야마성이 완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다다마사는 옛 영지였던 미노국 사람들을 불러 '미노 장인 마을'을 만들고, 교토, 오사카, 오와리 등지에서 사람들을 초청해 '신 장인 마을'을 조성했다. 또한 구제 우마 시장을 여는 등 경제 활성화 정책을 펼쳤다. 요시이강 제방 공사 및 이에 따른 카와라 마을, 훈도 마을 건설, 미사카 지역 도로망 정비와 숙소 신설, 농업 용수로 확보 등 다양한 공공 사업을 추진하여 쓰야마 번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다마사가 마무리하지 못한 사업들은 아들 모리 나가쓰구가 이어받아 완성했다.
1626년(간에이 3년), 적자인 타다히로는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이자 마에다 도시쓰네의 딸인 가메즈루히메와 혼인했다. 이는 쇼군 가문이 주선한 결혼으로, 다다마사는 마에다 가문과 인척 관계를 맺고 도쿠가와 가문의 준 일문(準一門, 가문에 준하는 대우) 지위를 얻을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1630년(간에이 7년) 가메즈루히메가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쇼군 가문과의 관계는 끊어졌고, 준 일문이 될 기회도 사라졌다. 1633년(간에이 10년)에는 아들 타다히로마저 가문을 잇지 못하고 사망했다.
같은 해 호리오 타다하루가 후사 없이 사망하여 호리오 가문이 단절되자, 다다마사에게 이즈모, 이와미, 오키 3개국으로 영지를 늘려 옮겨가는 이야기가 나왔다. 로주인 사카이 타다카츠가 이를 제안했고, 다다마사는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결국 받아들였다.[1]
이듬해인 1634년(간에이 11년), 다다마사는 사망한 아들 타다히로를 대신하여 외손자인 세키 이에쓰구(훗날의 모리 나가쓰구)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 7월 6일, 교토의 오몬지야 소미(大文字屋宗味)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묘켄지로 돌아가던 중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다. 심한 복통과 구토 증상을 보였으며, 치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인 7월 7일 새벽에 사망했다. 사인은 복숭아를 먹고 식중독에 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년 65세였다.
교토 다이토쿠지의 탑두(塔頭, 큰 절에 속한 작은 절)인 산겐인(三玄院)에 묻혔다. 계명은 혼겐인덴젠사쿠슈타이슈센오소신다이거사(本源院殿前作州太守仙翁宗進大居士)이다. 가문은 양자인 나가쓰구가 이었다. 다다마사가 쇼군 가문과 정식으로 만나기 전에 사망하면서, 3개국으로 영지를 옮기는 이야기는 없던 일이 되었다.[1]
4. 관력
※ 날짜는 모두 음력 기준이다.
참조
[1]
서적
森家先代実録
2024-01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近代文芸社
[3]
문서
田丸文書、信濃史料
2024-01
[4]
서한
慶長5年9月末日付徳川秀忠書状
2024-01
[5]
서적
長野市誌、更級郡誌
2024-01
[6]
서적
大原町史. 通史編
2024-01
[7]
서적
美作太平記
2024-01
[8]
웹사이트
津山城(鶴山公園) {{!}} 岡山県北の生活情報 アットタウンWEBマガジン
https://afw-at.com/p[...]
2019-03-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